[HMM50년 돌아보기-29] ‘글로벌 치킨게임’과 한국 해운업의 위기

채명석 기자

2026-05-01 09:02:32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물동량 급감, 주요 선사 모두 파산 위기
연료비 절감 위해 저속운항에 최적화된 초대형 컨테이너선 발주
경쟁에 밀린 한국 해운업 물동량 2009년 이후 위상 급격히 추락
용선 비중 높은 고비용 구조로 인해 구조조정 불구 수익 하락 지속

현대상선 컨테이너선 현대 싱가포르호가 미국 LA에 위치한 CUT에 기항하고 있다. 사진= HMM
현대상선 컨테이너선 현대 싱가포르호가 미국 LA에 위치한 CUT에 기항하고 있다. 사진= HMM
[빅데이터뉴스 채명석 기자] 2008년 리먼브라더스의 붕괴로 촉발된 글로벌 위기는 단숨에 전 세계의 교역 질서를 뒤흔들었고, 해상운송 시장으로도 빠르게 전이되며 세계 해운시장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먼저 물동량이 급감했다. 2007년 11%, 2008년 4%의 성장을 보였던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은 2009년 들어 사상 최초로 9% 역성장했다. 벌크시장의 경우 2008년 5월 1만 1793까지 올랐던 BDI(발틱운임지수)는 2008년 12월에는 663으로 7개월 만에 무려 94%나 폭락했고, 하팍로이드·CMA-CGM·MOL 등 세계의 주요 선사들 모두가 심각한 적자 구조로 진입하며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각국의 해운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비상한 대응을 했다. 운항을 줄이면 시장을 잃고 운항을 늘리면 손실이 커지는 역설적인 전쟁 상황에서 단순한 가격경쟁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버티기 경쟁’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해운시장은 기술과 자본, 정책, 얼라이언스, 규모 등 다양한 조건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전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전장으로 변질됐다.

컨테이너선사 현황 (2011년 12월 20일 기준) 자료= HMM 50년사
컨테이너선사 현황 (2011년 12월 20일 기준) 자료= HMM 50년사

자칫 해운 생태계가 붕괴할 위기에 직면하자 각국 정부가 자국 선사들에 대해 채무 조정, 지급 보증, 발주보조금 지원, 정책금융 공급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 지원에 나섰다. 정부 지원을 받은 선사들은 저속운항(Slow Steaming)에 최적화된 초대형선을 발주하며 공세를 강화했다. 이들 선박이 본격적으로 취항하기 시작한 2013년 무렵부터는 해운시장의 경쟁이 한층 더 격화됐다. 이 무렵 저속운항은 연료비를 절약하는 방안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기존에는 23~26노트의 고속 운항이 일반적이었으나 18~20노트의 저속운항이 연료비 절감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저속운항이 보편화됐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중형급 선박이 초대형선으로 빠르게 대체되면서 불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선복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야말로 출혈경쟁을 감수하는 글로벌 치킨게임이 본격화됐다.글로벌 선복량의 증가율이 물동량 증가율을 웃도는 공급과잉 상태가 되자, 머스크, MSC, CMA-CGM 등 대형 선사들은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앞다퉈 운임 인하 경쟁을 벌였다. 단위비용이 낮은 초대형선을 무기로 중형 선사들을 압박하며 남보다 오래 버티려는 전략이었다.

해운시장에서 벌어지는 글로벌 치킨게임은 이미 경제논리를 벗어난 장기 소모전으로 변질되었다. 머스크 등 초대형 선사들은 저운임으로 운항을 지속하며 상대적으로 규모와 자본이 약한 선사들은 시장에서 퇴출되도록 유도했다.

머스크가 2011년 대우조선해양에 1만8000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급 컨테이너선 20척을 한꺼번에 발주할 당시만 해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해운사들 대부분은 1만8000TEU급은커녕 1만TEU급도 몇 척 없었다. 머스크는 2015년에 1만9630TEU 컨테이너선 11척을 추가로 발주하기도 했다. 물동량은 정해져 있는데 선박의 외형이 커지다 보니 운임이 급락했다. 몇몇 노선은 운임이 70% 넘게 하락하기도 했다.

글로벌 10대 해운강국 2001년 vs 2011년 선복량 비교 (자료 : 알파라이너, 단위: TEU)
글로벌 10대 해운강국 2001년 vs 2011년 선복량 비교 (자료 : 알파라이너, 단위: TEU)

이 같은 글로벌 경쟁의 파고 속에서 한국 해운업은 급속히 흔들렸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 5위권에 올랐던 한국 해운의 점유율은 2009년 이후 급격히 떨어졌고, 운항 효율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도 크게 늘어났다. 운임이 하락해도 선박은 움직여야 했지만 연료비와 용선료는 줄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움직일수록 손해 보는 시장’이 되었다.

용선 비중이 높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들은 이 경쟁의 중심에서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국내 선사들은 핵심 노선이던 유럽·미주 노선에서 운임이 급락하자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일부 항로를 감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기선의 특성상 운항을 완전히 중단할 수는 없어 손실이 누적됐다.

해외 선사들과 얼라이언스에 참여하여 노선 공유, 공동 운항을 도모하며 운항 효율을 높이고, 노선 재편, 자산매각, 정보화 등 다양한 자구책을 동원했지만, 세계 무역의 둔화와 운임 하락의 늪에서 헤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 격화된 초대형선 경쟁은 공급과잉을 심화시켰다. 그 결과 운임은 더 떨어졌고, 이를 버티지 못한 선사들은 잇따라 시장에서 퇴출됐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등 대형 선사들도 퇴출 직전의 위기에 내몰리며 생존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얼라이언스 협업을 통한 효율화에도 불구하고 원가구조가 개선되지 않아 영업적자가 지속되었다.

현대상선은 자산매각이나 부채조정으로 유동성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운임 하락으로 현금흐름이 악화하기 시작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며 외형 유지가 점점 불가능해졌다.

<자료: HMM 50년사>

채명석 빅데이터뉴스 기자 cm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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