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2차례 걸친 석유파동으로 경제 위기
벌크선 사업 확장‧신규 항로 개설로 위기 극복
1980년 국내 첫 자동차운반선 ‘현대 1‧2호’ 취항
1981년 국내 최대 광탄선 ‘현대 퍼시픽’ 인도 투입

석유 의존도가 높고 에너지 안보에도 소홀했던 대한민국은 제2차 석유파동에 직격탄을 맞았다. 제1차 석유파동 때만 해도 산업구조가 미성숙한 상태여서 다른 나라에 비해 충격이 크지 않았는데, 수년 사이에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전환되고 경제 규모도 커져 유가 급등으로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다.
제2차 석유파동은 해운업계에 불황의 파고를 일으키며 큰 고통을 불러왔다. 당시 불황은 한국에서 해운업이 시작된 이후 처음 겪는 긴박한 위기였다. 석유파동 여파로 유가가 급등하고 경기는 침체하면서 화물은 감소하고 운임은 급격하게 추락했다. 통계에 따르면, 세계 물동량은 1980년 36억 600만t에서 1983년 30억9000만t으로 감소했고, 운임은 운항 원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중동·유럽의 20만DWT(재화중량톤수)급 유조선 운임의 경우 1973년까지만 해도 1항차에 880만 달러 수준이었으나 1984년에는 그 10분에 1도 안 되는 80만 달러로 내려앉았다.
공교롭게도 국내 해운업계가 1970년대 말부터 1981년 무렵까지 추진한 선대 확대 정책이 해운업계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국내 해운업계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추세를 낙관적으로 예상하여 왕성하게 선복량 확대를 추진했다. 1981년만 해도 활황기에 발주한 선박과 고가의 중고선을 더해 무려 56척 122만 총톤(GT)에 달하는 선박이 증가했다.
해운업계를 덮친 전례 없는 불황으로 아세아상선 역시 다른 선사들처럼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아세아상선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먼저, 자동차 수송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본격화했다.
아세아상선이 자동차 수송에 관심을 가진 것은 현대그룹 내 계열사인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수출을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현대자동차는 1976년 최초의 독자 모델인 국산 자동차 ‘포니(Pony)’를 개발하고 한국 자동차산업 최초로 에콰도르에 수출을 시작했다. 캐나다, 미국 등 북미 시장 진출도 겨냥하고 있어 향후 수출 물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아세아상선은 주로 유조선 운항과 중동 건설 특수에 의존하던 사업 구조에서 탈피해 사업 구조를 다변화하기로 하고 자동차 수송에 주목했다. 중동 건설 특수가 점차 퇴조하는 추세여서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아세아상선은 1978년 3월 동방유량과 합작으로 자동차와 동방유량의 대두 수송을 겸할 수 있는 자동차·벌크 겸용선 2척을 발주했다. 또 자동차전용선 2척도 발주해 향후 물량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 자동차 수송 시장에 대비했다. 본사에는 부정기선부 산하에 자동차 수송팀을 신설해 관련업 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벌크 겸용선(3만 1000DWT급)으로 기록된 2척의 선박은 1980년 4월 건조가 완료됨에 따라 ‘아세아 썬호’, ‘아세아 리더호’로 각각 명명했다. 이어 5월에는 자동차전용선 1척을 인도받아 ‘현대1호’로, 7월에는 나머지 1척도 인도받아 ‘현대2호’로 명명했다. 이로써 아세아상선은 겸용선을 포함해 모두 4척의 자동차선을 보유하며 자동차 수송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북미 시장을 향한 현대차의 자동차 수출이 아직 성사되기 전이고,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의 위기감이 고조된 때여서 4척의 자동차선을 독자적으로 운항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에 잠정적으로 이들 4척의 선박을 일본 선사에 용선하여 이용하도록 했다.
아세아상선은 비록 자동차전용선을 건조 직후 곧바로 자동차 수송에 투입하여 독자적으로 운항하지는 못했지만, 용선 과정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노하우가 그 후 아세아상선이 세계적인 자동차 수송 선사로 자리 잡는 바탕이 되었다.

아세아상선이 광탄성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설립 초기부터였다.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제철 사업의 원료인 철광석과 유연탄을 외국 선사에 수송을 맡겨 수입하고 있었다.
아세아상선은 이 철광석과 유연탄 등 광물자원의 수송을 수주하고자 포항제철과 수차례 접촉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 이후 광물자원의 수입 물량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중화학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규모가 큰 산업체가 증가하면서 철광석과 석탄류를 비롯한 광물자원의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더욱이 고유가에 대응하는 석유 대체에너지로서 석탄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여서 광물자원의 운송 물량은 한동안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아세아상선은 머지않은 장래에 포항제철의 물량을 수주해 전용선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977년 10월 제3차 계획조선에 따라 당시 국내 최대급인 12만8000DWT급 광탄 전용선을 현대 울산조선소에 발주했다. 이 배는 당시 계획조선으로 건조한 선박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광탄 전용선은 1981년 6월 8일 준공되었다. 아세아상선은 이 선박을 ‘현대 퍼시픽(Hyundai Pacific)호’로 명명했다. 그리고 준공 당일 포항제철과 18년간 제철용 원료를 수송한다는 내용의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운항을 시작했다. 선박이 준공되는 동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서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회동하며 협상을 진전시킨 결과였다. 이로써 아세아상선은 광탄 운송 분야에 진출하여 사업 영역 다각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현대 퍼시픽호는 당시 국내 조선소에서 자체 건조한 벌크선 중 최대 규모로, 철광석과 석탄을 전용으로 실을 수 있는 특화 구조를 채택했다. 고중량 화물을 안전하게 적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강점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해운사가 해외 조선소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하여 자원 수송 전용선대를 강화한 선박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현대 퍼시픽호는 철광석 수입(호주·브라질)과 발전용·제철용 석탄 수송에 투입돼 한국 중화학공업과 철강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국가적으로 자원 수송 자립화를 실현하는 초석이 되었다. 또 아세아상선은 대형 전용선을 바탕으로 국제 자원 해상수송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것은 물론, 정기선·컨테이너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자료: HMM 50년사>
채명석 빅데이터뉴스 기자 cms@thebig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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