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막말 후보 걸러낸 민심, 품격있는 정치와 언어 기대

2020-04-27 09:52:04

김희정 / 미디어 & 스피치 연구소 소장. 전 KBS 아나운서
김희정 / 미디어 & 스피치 연구소 소장. 전 KBS 아나운서
4.15총선이 끝났다. 결과는 여당 압승, 야당 참패다. 언론은 그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갑론을박 호들갑을 떨어댄다.

분명한 것은 야당 지도부를 포함한 막말로 점철된 다수 정치인의 언어 문제일 것이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 후보들의 막말이 참패의 한 원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막말로 미디어 노출 빈도를 높이며 유명세를 탄 후보들이 모두 낙선되었다는 사실은 민심이 뭘 원하는지 확인 된 셈이다. 실제로 미래통합당 후보들의 말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다만 이제 우리나라 정치인의 언어 사용도 품격이 있고 격조가 있어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막말 정치인이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이낙연 후보는 황교안 대표와 달리 특유의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제 1야당 대표인 황 후보와 TV 토론을 할 때도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황후보가 이후보에게 ‘말을 바꿔 신뢰할 수 없다’는 취지로 공격을 했는데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 “저는 황후보가 말을 바꾸더라도 황후보를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만약 평소 거친 언행을 했던 후보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이는 믿음이 가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낙연 후보는 유세장에서도 황후보를 인정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그를 자신과 함께 협력하여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지도자라고 하면서 “황후보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쟁터처럼 치열한 선거유세장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따뜻한 언어다. 이런 언어를 구사하는 정치인이라면 우리 국민의 수준에 걸맞은 정치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정치인, 품격있는 정치인이라고 하면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와 대결했던 존 맥케인이 생각난다. 그는 유세장에서 한 여성이 오바마를 두고 아랍인이라고 하자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아니다. 오바마는 점잖은 가정의 훌륭한 미국시민이다”라고 바로 잡아준 것이다.

흑인이며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바마(오바마의 풀 내임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다)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아주 결정적인 것이었다. 존 맥케인은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페어플레이하는 품격을 보여준 것이다. 맥케인은 또한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오늘 밤 미국인들은 지구위의 가장 위대한 국민이 되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의 우아한 화법은 맥케인을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패배자로 기억하게 한다.

반면 황교안 후보는 선거에서 패배한 뒤 미래통합당 대표직을 사퇴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나라가 잘 못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든 책임을 제가 짊어지고 간다.” 뭔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다. 여당 압승, 야당 참패라는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폄하하고 있다. 이제부터 나라가 잘 못 갈 것이 분명하다는 악담에 가깝다. "일선에서 물러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제 역할이 뭔지 성찰하겠다."라고도 했으나 그런 자세로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지 않다.

김종인 위원장은 “자세도 갖추지 못한 정당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는 말도 했는데 이 또한 국민이 듣기에는 실망스러운 말이다. 어제까지 유세장을 돌면서 지지를 호소하다가 막상 선거결과가 참패로 나오니 “자세도 갖추지 못한 정당” 운운하는 것은 책임회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패배 앞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책임지는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은 이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코로나19사태를 맞아 세계적으로 사재기가 일어날 때, 우리 국민은 침착하고 성숙하게 대처했다. 더구나 이번 4.15 총선에서 나타난 유례없이 높은 투표율은 성숙한 민주 시민의 표상을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국민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품위 없는 막말로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선거에서 참패하고도 국민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낙연 후보가 유세장에서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많은 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고 말씀하신다. 일류 정치인을 뽑으려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된다.” 득표율을 보면 공감하는 국민들이 많았던 같다. 일류정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삼류정치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유권자들의 의지가 이번 선거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자극적인 막말로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었던 후보들은 모두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퇴출되었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꿔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인이나, 유권자의 판단은 도외시한 채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국민은 일류인데 정치만 삼류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정치인들도 달라져야 한다. 품격을 갖춘 신뢰와 설득력 있는 정치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K-방역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숙한 국민 수준에 부합하는 품격있는 정치 언어를 기대해본다. <김희정/ 미디어 & 스피치 연구소 소장/ 전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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